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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강병원은 의료기관의 질과 환자 안전을 인정받아 보건복지부로부터 의료기관 인증을 획득했습니다.

제목 [매일신문][사람들][매일 파워 인터뷰] 보강병원 지용철 이사장
작성자 한상민 조회수 1,451 작성일 2017-10-06 09:55:17

 "건강을 두루 펴는 마음으로 환자에게 정성 다하면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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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용철 보강병원 이사장은 “의사는 환자의 마음을 잘 읽어야 한다”며 환자와의 소통을 강조한다.

그는 1994년 보강병원을 개원해 국내 대표적인 척추병원으로 키웠다. 

박노익 대기자 noik@msnet.co.kr

지용철(66) 보강병원 이사장은 매일신문 ‘파워인터뷰’에 우상현 W병원 원장 기사가 실린 것을

잘 읽었다고 기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우 원장은 국내 최초로 팔이식 수술을 집도한 의사이다.

지 이사장은  “우 원장은 훌륭한 의사다. 우연히 그의 연구실에 간 일이 있었다. 책상에 논문과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자기 전공 분야(수부외과 분야)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다.

지역사회가 그를 키워줘야 한다”고 했다.

오랫동안 의료 분야 취재를 했던 기자의 경험에 비춰볼 때 뜻밖의 얘기다. 의사는 특히 이름깨나

알려진 의사는 다른 의사에 대한 칭찬에 인색하다. ‘자기가 최고’라는 자부심이 그 어떤 직업보다

강하다. 그런데 지 이사장은 한참 후배인 우 원장을 치켜세웠다.

지 이사장은 영남대병원 신경외과 교수 출신이다. 그는 불모지나 다름없던 척추 분야를 개척했다.

그리고 척추질환을 특화한 병원을 차렸다. 올해 24년째다.

-보강병원은 척추질환 전문 병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비결은?

▶대학병원 교수 출신이 척추질환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병원을 세운 것은 전국 처음이었다.

당시(1994년)는 전문병원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다. 특화된 병원이어서 대학병원이 환자를 많이

보내줬고, 직원들도 ‘한마음’(지 이사장의 경영 모토이기도 하다)으로 열심히 일했다. 환자들이

입소문을 많이 내준 것도 큰 도움이 됐다.

-개원 후 이전, 증축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어려움도 많았겠다.

▶처음엔 대구 달서구 본리네거리에서 개원했다. 볼링장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병원을 만들었다.

개원 초기에는 의료장비나 시설이 열악했다. 4년 뒤인 1998년 1월 진천동으로 병원을

신축 이전했다. 이후 신관을 신축하고 본관을 증축하는 공사가 잇따랐다. 신촌세브란스병원,

일본의 유명 척추병원 등을 다니며 벤치마킹을 했다. 2004년 개원 10주년 기념식에서 ‘초일류

병원을 만들겠다’고 직원들에게 선포했다. IMF 구제금융 사태로 자금난을 겪기도 했다. 당시

금융기관 부채가 250억원이었는데, 금리와 건축 자재 값이 급등했다. 보강병원을 둘러싼

악성 루머가 나돌았다. 내가 중병에 걸렸다는 얘기도 있었다. 위기를 기회로 생각하고 버텨냈다.

-2001년 서봉의료재단을 설립했다. 의료재단 설립의 의미는? 그리고 서봉과 보강의 뜻은?

▶서봉(瑞烽)은 ‘상서롭고 찬란한 횃불’이다. 보강(普康)은 ‘건강을 두루 편다’란 의미다.

작명가에게 부탁해서 만든 것이다. 병원을 법인으로 만든 것은 지역사회 환원 차원이다.

물론 세제 혜택 등의 실리적인 이유도 있다.      

-10년 뒤 의료와 보강병원의 모습은?

▶허허! 그때는 내가 70대 후반이다. 하루가 달리 의료환경이 바뀌니, 지금 그 모습을 그려보는 게

쉽지 않다. 특히 4차 산업혁명은 의료의 형태에 많은 변화를 줄 것이다. 특히 의사와 인공지능(AI)의

역할 정립이 중요하다. AI는 진단과 치료 방향을 결정할 수 있지만, 실제 치료는 의사가 담당한다.

이런 변화에 발맞춰 의료윤리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보강병원은 이런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아들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3년 전부터 병원에서 경영수업을 하고 있다.

-척추질환 분야를 전문으로 한 1세대 의사다. 여러 나라의 의사를 찾아다니면서 수술법을

  배웠다고 들었다.

▶첫 직장은 진주의 한 병원이었다. 그곳에서는 주로 뇌수술을 했다. 3년 뒤인 1986년 영남대병원

교수가 됐다. 척추질환을 전담해야 했다. 당시 국내 대학병원에서 척추수술을 하는 교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외국의 선진 의술을 배워야 했다. 독학으로 영어를 익힌 뒤, 1987년

미국으로 떠났다. 먼저 뉴욕대학에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소개를 받아 메이오클리닉에서 연수했다.

한국인 신경외과 전문으로는 연수생 1호였다.

이후 일본, 캐나다를 거쳐 1989년 프랑스 파리대학병원에 갔다. 척추수술 기구를 만든 유명한

교수에게 한 수 배우기 위해서였다. 무작정 찾아갔다. 그 교수를 만나기까지 꼬박 사흘이 걸렸다.

한국에서 준비해 간 슬라이드를 보여주며, 수술 사례를 발표했다. 모두 실패한 사례였고, 그것도

교수가 고안한 기구로 한 수술이었다. 교수가 역정을 낼까 걱정했는데, 결과는 반대였다.

그는 실패한 원인을 그림을 그려가면서 설명했다. 수술을 보조하는 기회까지 줬다.

(지 이사장은 당시 공부할 때 사용했던 빛바랜 노트를 펼쳐보였다) 그렇게 8년간 10여 차례에 걸쳐

세계 유명 대학의 교수에게 코어(core`핵심)를 배웠다.

-척추질환의 진단이나 수술법이 그때와 지금은 많이 달라졌겠다.

▶엄청나게 발전했다. CT가 국내에 처음 도입된 게 1980년대 초반이다. MRI는 1990년대에 보급됐다.

수술에 쓰는 나사못의 경우 예전에는 시간이 지나면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은 티타늄 등으로

소재가 달라졌고 견고하다. 수술 시간도 10시간에서 2시간으로 크게 단축됐다.

-언제부터 의사가 되고 싶어 했나?

▶고교 때 화학을 좋아했다. 그래서 서울대 식품공학과에 진학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담임 선생님이 내 뜻과 상관없이 경북대 의대 입학원서를 내버렸다. 만약 고집을 피워 식품공학과에

입학했다면 지금쯤 큰 식품가공업체를 운영하고 있을 것이다.(웃음)

-중`고교 시절, 어떤 학생이었나?

▶대구초등학교에 다니다가 봉덕초등학교로 전학했다. 학교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 공부를 게을리했다.(당시는 중학교 입시가 있던 시절이다)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능인중학교에 입학했다. 특설반에 들어갔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노는 게 좋았다.

지금도 그 시절 친구를 만나면 스스럼없다.(지 이사장은 중학교 동기회에 꼬박꼬박 나간다)

고교(대륜고)에 들어가서는 열심히 공부했다.

-환자들은 척추수술에 대한 두려움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이유로 수술을 꺼리기도 한다.

▶의학정보가 넘쳐나고 있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옥석을 가려내기는 어렵다. 척추질환의 경우도

그렇다. 수술에 대한 거부감도 문제지만 장밋빛 기대도 바람직하지 않다.

수술에 실패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하지 말아야 할 수술을 한 경우다.

둘째, 환자의 민감성이다. 통증에 예민하거나 우울증이 있는 경우가 그렇다.

셋째, 수술을 잘못한 경우다.따라서 의사와 환자는 이런 요인들을 충분히 검토한 뒤 수술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의사는 수술 전에 환자에게 자세히 설명해야 한다. 수술을 왜 하는지, 수술을 하면

어떤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는지, 그리고 다른 대안은 있는지 등을 알려야 한다. 수술은 급하게

할 필요가 없다.

-오랜 세월 수술 집도를 하다 보면, 척추에 무리가 있을 텐데.

▶수술을 하고 나면 온몸이 뻐근하다. 관절과 근육에 부담을 많이 준다. 특히 목 주변이 심하다.

스트레칭을 꾸준히 한다. 따로 운동시설에 가지 않고 집에서 한다. 목, 어깨, 허리의 근육을 풀고

윗몸 일으키기를 한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30분 정도 걷는다.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이다.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방법은?

▶예전에는 술을 자주 마셨다. 하지만 역류성 식도염이 있어서 술을 절제하고 있다. 클래식음악을

자주 듣는다. 젊었을 때는 클래식 기타를 연주했다. 경북대 의대 클래식기타 동아리인 ‘현우회’의

창립 회원이었다. 40대 중반까지 기타를 쳤다.

-병을 잘 고치려면 의사와 환자 간의 라포(rapport`상호신뢰관계) 형성이 중요하다.

 환자와 소통을 잘하는 의사로 소문났다.

▶외국의 여러 병원에서 연수하면서 많이 배웠다. 특히 외래 진료 스타일을 바꿨다. 영남대병원에

근무할 때는 일요일에도 병동 회진을 했다. 환자의 얘기를 잘 들어야 한다. 환자가 느끼는 증상은

진단할 때 중요하다. 통증에도 종류가 많다. 저리고, 시리고, 따끔거리고, 욱신욱신하고….

이런 것들을 잘 구별해야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다. 따라서 환자에게 최대한 시간을 줘야 한다.

물론 한국의 의료체제에서는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노력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낮은 수가와 행위별수가제로 인해 짧은 시간에 더 많은 환자를 진료해야 병원

수입이 늘어나는 의료제도의 문제점이 있다. ‘3분 진료’라는 말이 이를 대변한다)

-많은 환자를 수술하면서 보람도 많았겠다.

▶의사가 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수술을 7천 건쯤 했다. 수많은 환자들이 내 손을 거쳤다.

(내게 수술을 받은 환자들이) 공항에서, 백화점에서, 심지어 미국 뉴욕에서도 나를 알아보고,

“원장님 덕분에 허리 펴고 산다”며 인사를 한다.

-기억에 남는 환자는?

▶개원 20주년 기념식에 40대 여성이 남편과 함께 인사를 하러 왔다. 그 여성은 상인동 도시가스

폭발 참사 때, 복합골절로 수술을 받은 사람이다. 죽거나 큰 장애를 안고 살지도 모를 환자였다.

20년 만에 병원을 찾은 그 여성은 “수술을 잘 해줘 건강을 회복했고, 결혼하고 아이도 낳을 수

있게 됐다”며 고맙다고 했다.

-지금도 집도를 하는가?

▶올해부터 외래진료와 비수술적 치료만 한다. 내게 수술받기를 원하는 환자들이 있다. 그럴 때는

이제는 나보다 우리 병원 다른 의사들이 실력이 좋다고 얘기한다. 외래진료도 화`목요일에만 한다.

1시간에 5명 이하로 예약을 받는다. 진료시간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서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여든 살까지 외래진료를 하고 싶다.

-후배 의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왜 의사가 됐는지’를 수시로 생각해야 한다. 의료환경이 갈수록 어려워지지만, 의료제도만

탓해서는 안 된다. 의사를 천직으로 여겨야 한다. 환자에게 정성을 다하면 성공할 수 있다.

열심히 진료하면 돈은 따라온다. 의사들끼리만 만나서는 안 된다. 대인관계의 폭을 넓혀야 한다.

중학교, 고등학교 친구들을 자주 만나야 한다. 그래야 늘푼수 있는 사람이 된다.


◆보강병원은?

▷연혁=1994년 대구 달서구 본리동 개원/ 1998년 달서구 진천동 이전 신축/ 2000년 신관 및 주차장 확장/

2001년 의료법인 서봉의료재단 설립/ 2007년 보강 새 병원 오픈 기념식/ 2015년 보건복지부 척추전문병원 지정

▷진료과목=신경외과/ 정형외과/ 영상의학과/ 내과/ 마취통증의학과/ 재활의학과

▷진료현황(2016년 기준)=외래환자 연간 12만1천 명/ 입원환자 연간 5천700명

▷규모=직원 227명/ 병상 210개

김교영 선임기자 kim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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