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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매일신문. 2010.12.13] 메디컬 프런티어
작성자 이미희 조회수 6,482 작성일 2010-12-20 12:02:16
[메디컬 프런티어] 보강병원 지용철 병원장

보강병원 지용철(59) 병원장은 25년 가까이 척추에만 매달려 왔다. 지역에서 첫 척추병원을 개원했고, 많은 척추 전문의도 배출했다. 그는 열정적으로 인터뷰에 임했다. 그만큼 환자들에게 알려주고픈 정보도 많았고, 짧지않은 의사 생활에서 터득한 경험과 노하우도 넘쳐났다. 인터뷰 내용 중 절반도 채 싣지 못했다. 스스로 척추수술의 '종착역'이자 '판정관'이라고 말하는 그는 "행여 잘못된 경우가 있으면 내게 오라"고 말한다. 한평생 척추와 함께 한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자.

◆새로운 수술법 도입

공직에 몸 담고 있던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난 뒤 가정 형편은 몹시 어려웠다. 때문에 그는 일찌감치 진주에 있는 한 병원에서 봉직의사로 근무를 시작했다. 적잖는 보수를 받았다. 그만큼 밤낮없이, 휴가도 챙기지 못한 채 일에 매달렸다. 그러던 중 영남대병원에서 교수직 제의가 왔다. "실력이 부족하니 안 된다고 했죠. 마음의 준비도 안 돼 있었고요." 하지만 몇 차례 이어진 제안을 뿌리칠 수만은 없었다. 결국 3년간의 봉직의 생활을 접고 대학병원에 가게 됐다. 월급은 종전의 절반도 채 안 됐다.

"새로운 것에 도전해보자는 생각이 컸습니다. 물론 부담도 컸죠. 개강을 앞두고 두 달간 여관방을 잡고 혼자서 다시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하지만 적응은 쉽지 않았다. 동료들과 달리 박사학위는커녕 석사 학위도 없었다. 뒤늦게 합류한 탓에 동료들의 싸늘한 시선도 감수해야 했다. 게다가 종전에 뇌 수술만 하다가 갑작스레 척추를 전문으로 해야 하는 부담도 떠안았다.

"점심시간, 주말도 없이 공부했습니다. 밤에는 동료들과 술도 마셨죠. 그래야 어울릴 수 있으니까." 의사로서 한계를 느낄 때가 많았다. 1986년 당시만 해도 국내에 척추를 전문으로 하는 교수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책을 통해 척추를 배웠고, 새로운 수술기구를 접할 때면 사용설명서만 보고 수술에 임해야 했다. 어렵다고 포기하는 수술도 새로운 방법과 기구가 있다면 찾아내서라도 해봤다. 실패도 적잖았다. 하지만 새 수술법이 아니라면 손도 못 써볼 환자들이었다. 그에게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실패를 통해 배운 수술 노하우

"8년간 영남대병원에 재직하면서 10여 차례에 걸쳐 세계 유명대학 교수들로부터 정성 어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이 짧은 한 문장으로 끝날 일이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1989년 프랑스 파리대학병원에 한국인으로는 처음 연수를 갔다. 척추수술 기구를 새로 고안한 저명 교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수술기구 중개상을 통해 연락처만 받고 무작정 떠난 길. 한국에서 온 이름없는 의사를 만나줄 리가 없었다. 병원 관계자에게 명함을 건넨 뒤 로비에서 사흘간 꼬박 기다렸다.

"사흘째 그 교수님이 나와서는 악수로 맞아주더군요. 이튿날 준비해 간 슬라이드 사진을 보여주며 실패한 수술사례를 발표했습니다. 자기가 고안한 기구로 수술했는데, 실패한 사례만 모아서 보여주니 기분이 나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정반대였다. 수술을 보조하며 실패한 이유를 일일이 알려줬고, 3주 연수를 마칠 무렵 근사한 식사대접과 함께 미발표 논문까지 보여줬다.

이런 경험은 한두 번이 아니다. 1990년 일본 훗카이도대에 척추로 유명한 교수를 찾아가서도 똑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그 교수가 고안한 수술기구로 실패한 사례를 보여줬다. 바로 그 날, 그 교수는 수술실로 불러서 직접 세세한 설명을 해줬다.

◆허리 수술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지금에야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다. "일기를 쓰면서 수도 없이 포기하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의사로서 환자의 고통을 외면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영남대병원을 떠날 때에도 많은 고민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달서구 본리동 본리네거리에 개원했다. 지역 척추병원의 효시인 셈이다. "대학병원에서도 못하는 수술을 개원병원에서 했습니다. 3, 4개월이 지나자 하루에 150명가량 환자가 몰리더군요. 당시 매년 척추수술만 300~400건을 했습니다."

척추수술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흔히 '디스크'로 알려진 디스크탈출증과 협착증이다. 보강병원의 경우, 지난해에만 디스크탈출증 760건, 협착증 316건을 수술했다. 이보다 훨씬 많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척추수술을 많이 했다고 해서 좋은 것만은 아니다. 특히 디스크 수술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많다보니 행여 무리한 수술을 했다는 눈총을 받을 수도 있다.

"사실 디스크 환자 중 90%는 수술이 필요 없습니다. 가령 우리 병원의 경우만 해도, 척추와 관련해 찾아온 외래환자가 9만여 명에 이릅니다. 중복 방문을 빼고 환자 숫자만 따져도 5만~6만여 명인데, 이들 중 1천61명 만이 디스크와 협착증 수술을 받았습니다."

◆국내 최초 수술법 도입

지 병원장은 질환 정보가 넘쳐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허리질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했다. "허리통증으로 찾아오면 대개 3주~3개월간 비수술요법을 합니다. 그런 뒤에 수술여부를 결정하죠. 그 전이라도 심각한 신경마비가 있거나 대소변 장애가 있다면 수술해야 합니다. 물론 재발도 합니다. 디스크 수술 후 10~20%가 재발합니다. 디스크 수술을 받고나면 재수술을 못 한다거나 인공디스크를 쓴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틀렸습니다. 재수술도 가능하고, 인공디스크는 효과가 미미해 거의 안 씁니다."

물론 환자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반드시 이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자신의 병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환자가 아는 것은 중요하다고 지 병원장은 생각한다. 그가 대학병원 시절 국내 최초로 도입한 수술법도 적잖다. 목 손상환자의 후방 금속판 고정술(로이 까밀레 기구고정술)과 개복술로 척추를 고정하는 가네다 기구고정술을 1988년 처음 시작했고, 1990년엔 '라손씨 접근법'으로 알려진 수술도 최초로 도입했다. 그는 지금도 의사는 꾸준히 공부해야 한다고 믿는다. 매년 9월 저명 교수를 초빙해 학술 심포지엄을 열고, 수시로 척추 중 특수분야에 대한 특강도 갖는다. "허리가 아프다며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는 환자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우리 지역 병원들도 의료진과 시설면에서 뒤질 게 없습니다. 믿고 찾아오셔도 됩니다."

글·사진=김수용

기사 작성일 : 2010년 12월 13일